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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How the Ganhwa Tradition Became the Main Stream in the Late Goryeo Dynasty Buddhis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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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최연식 (著)=Choe, Yeon-shik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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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보조사상=普照思想=Journal of Bojo Jinul's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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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 v.37 n.0 |
Date | 2012 |
Pages | 189 - 227 |
Publisher | 普照思想研究院 |
Location | Korea [韓國] |
Content type | 期刊論文=Journal Article |
Language | 韓文=Korean |
Note | 저자정보: 목포대학교 사학과 |
Keyword | 看話禪=Ganhwa Seon=Kanhua Chan; 공민왕=King Gongmin; 태고보우=Taego Bowoo; 나옹혜근=Na'ong Hyegeun; 설산천희=Seolsan Cheonhee; 환암혼수=Hwan'am Honsu; 목암찬영=Mog'am Chan'yeong; 입원유학=Entry into Yuan for the cultivation of Ganhwa Seon[Kanhua Chan]; 무자화두=the Investigation of (the Hwadu word of) Mu; Gyeonghan; Shin Don; Baeg'un |
Abstract | 지금까지의 간화선에 대한 연구들은 대부분 간화선 자체의 발전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간화선이 발전하게 된 정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말에 간화선이 불교계의 주류적 흐름으로 확립되는 것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화선 자체의 전개과정만이 아니라 간화선을 주류적 흐름으로 부상시켰던 정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14세기 후반의 간화선 전통의 확립 과정과 정치적 동향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고려후기 간화선의 전개과정을 불교계 내부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검토하고자 하였다. 14세기 후반에 간화선이 불교계의 주도적 흐름으로 정착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화엄학승 雪山千熙(1307-1382)의 入元 유학 및 간화선 전법 배경에는 설산천희의 구도심 못지 않게 정치적 의도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의 입원 유학 시점이 그의 주요한 후원자였던 辛旽(?-1371)이 국왕의 총애를 받고 정계에 등장하는 때와 일치하고, 그의 귀국 이후 왕실의 표창과 국사 책봉이 매우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산천희를 國師로 책봉하기 위하여 미리 입원 유학과 간화선사로부터의 전법을 기획하여야 했다는 것은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입원 유학과 간화선사로부터의 전법이 고승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입원 유학하여 중국 간화선사의 인가를 받아온 승려들이 최고위 승직에 올라 불교계를 주도하는 것은 공민왕대에 나타난 새로운 모습이었다. 기존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권문세족 출신들을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발탁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운영하려한 공민왕은 이전과 달리 주요 산문의 적통 계승자나 명문 가문 출신이 아닌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여 불교계를 주도하려 하였고, 이때 주목된 것이 입원 유학하여 전법해 온 太古普愚(1301-1382), 懶翁惠勤(1320-1376), 白雲景閑(1298-1374)과 같은 간화선사들이었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강남지방의 선사들로부터 印可를 받고 傳法 해온 간화선사들을 중용하는 공민왕대의 정책을 통하여 간화선은 고려 불교계의 유일무이한 정통적 흐름으로 자리잡아 갔다. 기존 산문의 배경을 갖는 승려들이 간화선과 함께 전통적인 선수행을 병용했던 것과 달리 기존 산문의 전통에서 자유로웠던 입원유학 간화선사들은 간화선의 우월성 선양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특히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이 강조한 무자화두 참구가 이 시기 간화선 수행의 정통적 흐름으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확립된 고려 불교계의 간화선 전통은 그들의 가르침을 계승한 幻庵混修(1320-1392)와 木庵粲英(1328-1390) 등의 활동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아 갔다. 고려말 불교계의 최고 고승은 태고보우와 나옹혜근 (및 백운경한)으로 널리 공인되었고, 수많은 승려들이 그들의 가르침의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우왕대에도 공민왕의 불교 정책은 충실히 계승되었고, 공민왕과 우왕이 통치한 40여 년의 기간은 고려 불교계에서 간화선이 주류적, 정통적 흐름으로 자리잡아간 시기였다.
Most of the studies on Ganhwa Seon tradition during the Goryeo dynasty have been focused on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Ganhwa tradition itself, without paying specific attention to the political or sociological background of such a development. In order to understand more objectively the establishment of the Ganhwa tradition as the dominant mainstream in the late Goryeo dynasty Buddhism, however, not only the process of its own development but also the political and sociological background of its ascension to the mainstream must be investigated concretely. This article purports to investigate concretely the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the Ganhwa tradition in the late 14th century and its relation with the contemporary political movement in order to examine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Ganhwa tradition in the late Goryeo dynasty not only from within the Goryeo Buddhism but also from its relation with the contemporary society in general. Hwaeom monk Seolsan Cheonhee(雪山千熙, 1307-1382)'s entry into Yuan for the cultivation and reception of the Ganhwa tradition, the symbolic exampl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Ganhwa tradition as the mainstream of Goryeo Buddhism was closely related with the political intention of contemporary rulers. The time of his entry to Yuan coincides with the rise of Shin Don(辛旽, ?-1371) as his main supporter with the favor of the king in the political arena. After his return, his official commendation by the Royal House and his appointment as the National Master were also processed as rapidly as had been planned earlier. In the appointment of Seolsan Cheonhee as the National Master, the necessity of the preparatory entry to Yuan and obtaining sanction from a Ganhwa master shows that the contemporary Goryeo Buddhism required such measures for the recognition of a monk as an eminent monk.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there appears a new rise to the most high posts and dominance, in the Goryeo Buddhism, of the monks who have studied at Yuan and obtained sanction from the Ganhwa Masters there. King Gongmin, unprecedentedly, attempted to lead the Buddhist circle by promoting not the proper successors of the established main traditions or of distinguished familial backgrounds but new and fresh figures without such backgrounds. In such a period, there grew special attention to the Ganhwa masters who returned from studying at Yuan, including Taego Bowoo, Na'ong Hyegeun |
Table of contents | 1.머리말 193
2. 화엄학승 雪山千熙의 看話禪 傳法을 위한 入元 196 3. 공민왕의 불교정책과 入元遊學 看話禪師의 중용 200 4. 入元 遊學 看話禪師들의 활약과 간화선 전통의 확립 210 5. 맺음말 217 |
ISSN | 12297968 (P) |
DOI | http://doi.org/10.22859/bojoss.2012..37.005 |
Hits | 153 |
Created date | 2023.01.31 |
Modified date | 2023.0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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