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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 휴정과 조선후기 선과 화엄=Cheongheo Hyujeong 淸虛 休靜 and His Influence on Seon and Hwaeom in the Late Joseon Peri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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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 |
김용태 (著)=Kim, Yong-tae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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掲載誌 |
불교학보=佛教學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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巻号 | v.73 n.0 |
出版年月日 | 2015.12 |
ページ | 63 - 90 |
出版者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Institute for Buddhist Culture |
出版サイト |
https://abc.dongguk.edu/kb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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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版地 | Korea [韓國] |
資料の種類 | 期刊論文=Journal Article |
言語 | 韓文=Korean |
ノート | 저자정보: 동국대 HK교수 |
キーワード | 淸虛休靜=Cheongheo Hyujeong; 看話禪=Ganhwa Seon; 臨濟法統=Linji (Imje) lineage; 禪敎兼修=SeonGyo gyeomsu; 履歷課程=Iryeok gwajeong; 華嚴=Hwaeom; 私記=Sagi |
抄録 | 본고는 조선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의 선교(禪敎) 인식을 ‘간화선(看話禪) 우위의 선교겸수(禪敎兼修)’라는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과 사상을 선(禪)과 화엄(華嚴)의 두 측면에서 살펴본 것이다.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표방한 임제법통(臨濟法統)과 간화선풍, 그리고 선교겸수의 방향에서 결실을 맺은 화엄교학의 성행 양상을 검토하였다. 휴정의 수행관 및 선교 인식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나오는 ‘방하교의(放下敎義)’, 즉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뜻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입문으로서 교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일정한 단계가 되면 지해(知解)에 얽매이지 말고 간화선 화두(話頭) 참구로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이다. 휴정은 간화선을 선양하면서도 선교겸수를 용인하였는데, 이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간화선 수행방식을 단계적으로 추구한 보조 지눌(普照知訥)의 수행체계와도 맞닿아 있다. 또한 선과 교의 두 전통을 모두 포괄하고 계승해야 했던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전반에는 중국 임제종의 법맥 계승을 표방한 임제태고법통(臨濟太古法統)이 정립되었다. 이는 간화선을 고양한 휴정의 수행관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간화선 우위와 선교겸수의 지향은 상충되는 지점이 있었다. 19세기의 선 논쟁 또한 선분류의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선 우위론과 선교병행론의 경합이었다. 조선후기 불교 수행체계의 두 축인 임제법통과 간화선, 선교겸수와 화엄교학이라는 선과 교 사이의 간극을 둘러싼 사상 논쟁이었던 것이다. 17세기에는 승려 교육과정인 이력과정(履歷課程)이 정비되었고 이는 선교겸수의 구도 하에서 짜인 것이었다. 또한 선과 교뿐 아니라 염불을 수행체계 안에 넣은 경절문(徑截門), 원돈문(圓頓門), 염불문(念佛門)의 삼문(三門) 체계가 정립되었다. 화엄은 이력과정의 마지막 과정인 대교과(大敎科)에 들어갔고 교학의 최고단계로 인정되었지만, 17세기 후반까지 화엄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1681년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의 불서(佛書)를 실은 중국 배가 표착한 사건을 계기로 백암 성총(栢庵性聰)이 징관(澄觀)의 『화엄소초(華嚴疏鈔)』를 간행, 유통시키면서 화엄 강학(講學)과 주석서인 사기(私記)의 저술이 활발해졌다. 이에 18세기에는 화엄 이해가 교학의 중심이 된 ‘화엄의 중흥시대’가 펼쳐졌다. 청허계(淸虛系) 편양파(鞭羊派)와 부휴계(浮休系)에서 화엄교학의 종장이 다수 배출되었고 1,000명이 넘는 청중이 참여한 대규모 화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설파 상언(雪坡尙彦), 연담 유일(蓮潭有一), 인악 의첨(仁嶽義沾), 묵암 최눌(黙庵最訥) 등이 강학과 사기 저술에 전념하면서 화엄교학에 대한 이해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화엄교학의 성행 양상은 대둔사(大芚寺)의 강학전통에서도 확인되는데, 화엄강학을 매개로 한 12대 종사(宗師)와 강사(講師)가 배출되었다. 이는 화엄을 비롯한 조선후기 교학전통이 간화선, 임제법통의 정통성과 병립되는 위상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This paper examines Cheongheo Hyujeong's 淸虛休靜 (1520-1604) view of Seon and Gyo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mbined practice of Seon and Gyo” (SeonGyo gyeomsu 禪敎兼修) with the emphasis on Ganhwa Seon. It also explores Hyujeong's influence on the Buddhist thought and practice in the late Joseon Period, in particular, Seon and Hwaeom. In doing so, the paper investigates the lineage claim that identified Joseon Buddhism as the Linji (Imje 臨濟) Seon school, and the Ganhwa Seon practice, as well as the popularity of Hwaeom doctrinal studies which resulted in the combined practice of Seon and Gyo. Hyujeong's view of Buddhist training, along with Seon and Gyo, can be shown well in his words such as “bangha gyoui” 放下敎義 or “sagyo ipseon” 捨敎入禪 from his magnum opus Seonga gwigam 禪家龜鑑. These words mean that when one reaches a certain level, one should move on to the word of the hwadu 話頭 practice without clinging to intellectual knowledge. Although Hyujeong promoted Ganhwa Seon, he approved the simultaneous cultivation of Seon and Gyo. This attitude is connected to Jinul's system of Buddhist training, which presented in turn the “simultaneous cultivation of samadhi and prajna,” “Sudden awakening followed by gradual cultivation,” and “Ganhwa Seon.” Hyujeong's approach in fact responds to the need of the time when both Seon and Gyo should be maintained and inherited. In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the Korean Seon community proclaimed it to be associated with the Linji school by establishing the Goryeo master Taego 太古 as its founder. This move was also linked to Hyujeong's soteriological view which promoted Ganhwa Seon. However, the promotion of Ganhwa Seon conflicted with the combined practice of Seon and Gyo. The 19th century Seon debate reflected a struggle between Seon priority and Seon/Gyo equivalence though the debate assumed the form of the Seon taxonomy. This debate, in particular, revolved around the tension between the two pillars of Buddhist training in the late Joseon: Seon, Linji lineage, and Ganhwa Seon on the one hand and Gyo, the combined practice of Seon and Gyo, and Hwaeom doctrinal studies on the other hand.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e monastic curriculum (iryeok gwajeong 履歷課程) was formed under the format of the combined practice of Seon and Gyo. The system of “Three Gates” (Sammun 三門) which not only embraced Seon and Gyo but also implemented the practice of yeombulmun (recitation of Buddha |
目次 | 〈한글요약〉64 Ⅰ. 머리말 66 Ⅱ. 청허 휴정의 선교 인식 68 Ⅲ. 임제법통과 간화선풍의 계승 72 Ⅳ. 선교겸수와 화엄교학의 전통 77 Ⅴ. 맺음말 84 〈참고문헌〉 86 〈Abstract〉88 |
ISSN | 12261386 (P) |
DOI | 10.18587/bh.2015.12.73.63 |
ヒット数 | 153 |
作成日 | 2022.09.11 |
更新日期 | 2022.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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