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조선 중기 순교승인 虛應 普雨(1506?∼1565)의 불교 중흥 노력에 대해 논구한 글이다. 조선은 유교를 國是로 내세운 나라였다. 해서 조선의 유자들은 유교 이외의 사유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특히 불교의 사원경제와 사원세력은 유자들의 주요한 타깃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왕들의 불교시책 역시 고려와의 단절을 의식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불교 정책은 불교의 존재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인간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세계에 대한 굴절된 시선을 낳았다. 그리고 조선조 사회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문정대비의 적극적 지원을 받은 보우는 불교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외롭게 저항했다. 그는 극심한 불교탄압에 맞서면서 유교의 세계관을 절대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유교적인 불교’와 왕권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강조하는 ‘국가(왕실)주의적인 불교’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왕권의 절대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먼저 보우는 禪敎 양종과 僧科 복원을 시도하면서 불교의 존재감을 확보하였고 度僧 실시와 度帖 부여를 통해 승려들의 지위 향상을 도모했다. 사상적으로는 禪敎一體論과 佛儒一致論을 넘어선 佛儒一體論을 전개하였다. 보우는 화엄가이자 선사였다. 화엄사상과 선사상은 한국불교의 주축이기도 하다. 보우사상은교의 정점인 화엄과 선의 정점인 돈오선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는 현상을 진리로 파악하면서 선과 화엄을 통합하여 선교일체론을 전개하였고,일정설을 통해 불교와 성리학 나아가 도가를 아우르는 논리를 제시하여 불유일체론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보우는 일체론에 의거한 선교일체설과일정설에 근거한 불유일체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응축 시키고 확산시켰다. 이것은 그가 불교 중흥이 단지 교단의 혁신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또 그는 교단 수호자의 역할을 넘어 철학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세웠다. 그가 일정설에서 주장한 ‘人卽天’의 인간관은 이후 그것은 東學의 人乃天 사상으로 더욱 체계화 되었다. 그리고 보우의 헌신적인 교단 복원과 치밀한 사상 구축 노력으로 약 15년 동안 조선 불교는 부흥의 기운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기반 위에서 다음 대를 이어갈 淸虛 休靜(1520∼1604)과 宋雲 惟政(1544∼1610) 및 浮休 善修(1543∼1615)가 승과에서 급제하였다. 보우가 회복시킨 불교 교단의 존재감은 결과적으로 팔도선교도총섭과 같은 기구로의 계승과 함께 전국적이고 자발적인 승려들의 거병으로 이어졌다. 나라가 위기 상황에 직면하였던 현실에서 불교의 존재감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승병 활동과 같은 護國의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 조선 유자들의 과도한 배타성 아래서 불교가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국난 극복을 위해서일어난 승병활동을 통해서 이 땅의 불교가 그 존재감을 계승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교양종과 승과복원을 통한 불교의 존재감 확보와 도승 실시와 도첩 부여를 통한 승려들의 지위 향상의 단초를 허응 보우가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일으킨 불교중흥의 노력에 대해 거듭 되돌아보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research Buddhist restoration effort of Heoeung Bou(1509?∼1565), who was a martyr in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Joseon was the country that selected Confucianism as a national policy. Therefore, the Confucians of Joseon excluded other philosophies except Confucianism. Especially, economy and power of Buddhist temple were main targets of Confucians. In the early part of Joseon Dynasty, Buddhist policies of kings were made by recognizing the disconnection form Goryeo. As a result, Buddhist policy was displayed in the way to deny the existence of Buddhism. The way caused distorted understanding of human and refracted view of the world. It stiffened the society of Joseon Dynasty. Bou, who was actively supported by Queen Dowager Munjeong, made a lone effort to restore the live coal of Buddhism. He searched for ‘national Buddhism’, which emphasized ‘Confucian Buddhism’ that admits the world view of Confucianism and absolute loyalty to royal authority. It is presumed that he had this kind of attitude because he did not despise absolute royal power of the age. Therefore, Bou tried the restoration of Seon & Gyo School and monk examination, secured the sense of existence of Buddhism and searched for the improvement of Buddhist priest’s position by performing Doseung system and granting Docheop(identity card for monk). From the aspect of philosophy, he displayed Bulyuilcheron(佛儒一體論) beyond Seonkyoilcheron(禪敎一體論) and Bulyuilchiron(佛儒一致論). Bou was a Huayan philosopher and Buddhist priest. He was also one axis of Korean Buddhism in the history of Huayan and Seon. In the philosophy of Bou, the sudden enlightenment, which is a peak of Huayan and Seon, became the foundation. He understood the phenomenon as a truth and displayed Seonkyoilcheron by combining Seon and Huayan. In addition, he suggested Bulyuilcheron by proposing the logic that includes Buddhism, Sung Confucianism and Taoism through Iljjungseol(一正說). In this way, Bou condensed and enlarged his philosophy through Seonkyoilcheron based on one thing theory and Bulyuilcheron based on Iljjungseol. It is because he was the philosopher, who knew the fact that Buddhist restoration could not be accomplished only through community’s innovation. Therefore, he confirmed his position as a philosopher beyond his role as a community guardian. His view of human, ‘Injeukchon’(人卽天), that he asserte
目次
I. 문제와 구상 54 II. 명종 이전 불교상황 57 III. 禪教兩宗과 僧科의 복원 62 IV. 禪教와 佛儒의 一體論 71 V. 국가불교의 성과와 한계 79 VI. 정리와 맺음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