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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世紀末朝鮮士大夫在異國的佛教經驗 -- 以魯認與姜沆爲中心=The Buddhist Experience Abroad of Korean Scholar -- Bureaucrat in the Late 16th Century: Focused on NoIn and Kanghang
作者 박영환 (著)=Park, Young-hwan (au.)
出處題名 선학=禪學=Journal of Seon Studies
卷期v.48 n.0
出版日期2017.12.30
頁次287 - 307
出版者韓國禪學會
出版者網址 http://www.seonstudy.org/seon/
出版地Korea [韓國]
資料類型期刊論文=Journal Article
使用語言中文=Chinese
附註項著者所屬: 東國大學校(Seoul campus)中語中文學科 敎授
關鍵詞《錦溪日記》=GeomKye Diary=『금계일기』; 《看羊錄》=Kanyang Note=『간양록』; 崇儒抑佛=Overwhelming Confucianism and Resisting Buddhism; 三教融合=the Intermingle of Three Religions=삼교융합; 儒佛融合=the Intermingle of Confucianism and Buddhism=유불융합; 독존유술=獨尊儒術
摘要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압송된 노인(魯認, 1566-1622)과 강항(姜沆, 1567-1618)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지역적으로 전라도 출신이란 점,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치욕을 참지 못하고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다는 점,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훗날 모두 무사히 귀국하였다는 점이 그러하다. 노인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으로 탈출하여 복건에서 약 4개월간 생활하다가 1599년 12월에 귀국하였고, 강항은 1600년 4월에 석방되어 대마도를 거쳐서 귀국하였다. 둘의 차이점도 있다. 강항은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일본에 남아 조선의 성리학을 전수해주었고, 일본의 문물제도 및 국토의 상황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이란 기록을 남겼다. 반면 노인은 철저한 목적성과 세밀한 안배, 포기할 줄 모르는 신념, 그리고 복건성 관리의 도움으로 결국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금계일기(錦溪日記)』라는 조선 최초의 중국 민(閩) 지역에 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금계일기』와 『간양록』을 통해 16세기 조선과 명, 일본의 각기 다른 불교관 및 종교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노인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독존유술(獨尊儒術)의 토대 위에 불교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배척적인 종교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반면 명나라 관원들은 유불도 융합이라는 포용적인 종교관을 유지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도 유불의 융합적인 관점 및 일본사회 건설에 대한 승려들의 공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승려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소중한 기록을 통해 16세기말 조선과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의 종교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이후 이들 국가의 문화형성과 그 차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here was one year difference in Kanghang’s and NoIn’s ages. They were all captured in “Second War of Jeong-yu”and sent to Japan. And the times they arrived in Japan were similar. However, NoIn absconded to Fujian, China at last and lived there for about 4 months until he returned to homeland in Dec. 1599. Kanghang was released in Apr. 1600 and returned to Korean dynasty by passing Tsushima Island. The difference is that one person left behind GeomKye Diary with the records of Fujian, China, and one person left behind Kanyang Note with the records of Japanese cultural relic, system and territory situations, etc. It could be learnt from these two documents that, the attitudes toward Buddhism of Korean scholars, Ming dynasty officials and Japanese officials are different. Ming dynasty officials held inclusive view of religion that Confucianism, Buddhism and Daoism could intermingle. NoIn and Korean officials held repulsive view of religion that Confucianism is overwhelming and the heresy should be attacked. Japan held the view of Confucianism and Buddhism’s intermingle. It is certainly that Buddhist Monks had high social position. The Buddhist situation of Korea contrasted sharply with Ming dynasty and Japan.

目次국문 초록 287
一. 序論 288
二. 從被俘虜到日本的佛教經驗 291
(一)魯認的日本佛教經驗 291
(二)姜沆的日本佛教經驗 295
三. 魯認的福建佛教經驗 299
四. 結語 303
參考文獻 305
Abstract 306
ISSN15980588 (P)
點閱次數198
建檔日期2022.06.03
更新日期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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