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습이 전한 인도의 중관학은 중국의 전통적 형이상학인 현학(玄學)과 만나서 ``동아시아적 중관학``인 삼론학이 창출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삼론학의 가르침은 불교교학의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북에서는 아비달마, 강남에서는 『성실론』이 불교교학의 중심에 있었다. 승랑은 구마라습 사후 잊혀지고 왜곡되던 삼론의 가르침을 강남의 불교계에서 부흥한 인물이며 승랑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삼론학을 고삼론, 이후의 삼론학을 신삼론이라고 부른다. 승랑과 승조. 승랑은 신삼론의 시조이고 승조는 고삼론의 대표적 저술가인데, 그 성향은 상반되었다. 승조는 후진의 황실과도 가까이 지냈고, 적극적으로 저술 활동을 했으며, 그 전기도 『고승전』에 실려 있는 반면, 승랑은 양무제의 초청을 거절하고 섭산에 은둔하면서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였고, 『화엄의소』를 지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단 하나의 저술도 남아 있지 않으며, 독립된 전기도 전하지 않는다. 승조가 구체적인 역사 속 인물이라면 승랑은 전설의 인물이었다. 승조의 논문 모음집인 『조론』 가운데, 「물불천론」에서는 ``동(動)과 정(靜)의 상즉``, 「부진공론」에서는 ``유와 무의 상즉``, 「반야무지론」에서는 ``지(知)와 무지(無知)의 상즉``, 「열반무명론」에서는 ``세간과 열반의 상즉``을 논변한다. 승조의 사상은 한 마디로 ``상즉의 비판론``이었다. 상즉이란 "A이면서 not-A이다."라는 명제로 표현되기에 중관학의 4구판단 가운데 제3구에 해당한다. 인도 중관학의 경우 제1구와 제2구를 비판할 때 제4구를 사용하였는데, 승조는 제3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하였다. 승조의 사상 가운데 많은 내용이 승랑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승랑의 사상은 ``이원적(二元的) 범주론``, ``상즉의 실상론``, ``방편적 교화론``, ``무득(無得)의 오도론(悟道論)``의 네 가지로 정리되는데 그 가운데 ``상즉의 실상론``이 승조의 사상에 근거한다. 현학에서는 명교(名敎)를 ``유``, 자연을 ``무``로 보았는데, 승조는 ``유``와 ``무``를 모두 명교로 격하시키고, ``비유비무``를 진제(眞諦)라고 불렀다. 명교는 이제(二諦) 가운데 속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승랑은 명교와 진제 모두를 ``속제``인 교법으로 격하시키면서 속(俗)도 아니고 진(眞)도 아닌 ``비진비속``을 이법(理法)으로 제시하였다. 아울러 중가(中假), 체용(體用) 등의 이원적 범주들을 새롭게 도입하고 변증법적으로 직조함으로써 무득(無得)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Seung-rang(circa 450~530C.E.) was the Patriarch of New Sān-Lùn(三論) sect and Sēng-Zhào(384~414) was a representative figure among Old Sān-Lùn monks. Sēng-Zhào was a disciple of the great translator Kumarājīva(344~413). His treatises on Universal flux, Śūnyatā, Prajñā and Nirvāṇa are compiled as a book Zhào-Lùn(肇論). He made a commentary on Vimalakīrti-nirdeśa-sūtra and wrote introductions on some Buddhist scriptures. We can read his biography in Gāo-Sēng-Chuán(高僧傳). It is not so difficult for us to know his life and understand his thoughts. He was familiar with Yáo-Xīng(姚興) an Emperor of Hòu-Qín(後秦). Sēng-Zhào was a concrete historical character and a monk of engagement. On the contrary Seung-rang's life is obscure and his philosophy has not been identified clearly. He is a man of legend. If we want to reconstruct the life story and philosophy of Seung-rang, we should gather all the sentences that describe Seung-Rang in the historical materials. There are so many names that indicate the masters of Sān-Lùn. To investigate objectively on the life and thoughts of Seung-Rang, first of all we should confirm those names that indicate only Seung-Rang. Some scholars insisted that Do-rang(道朗) is the real name of Seung-Rang. But Do-rang(道朗) is guessed to be a misreading of Dae-Rang(大 朗) written in grass hand style. In the year 512, Wǔ-Dì(武帝) of Liáng(梁) Dynasty invited Seung-Rang to his palace, but Seung-Rang refused the invitation because he preferred a life as a recluse. When Sēng-Zhào was young, he earned money by copying scriptures. He was interested especially in Lăo-Zǐ(老子). But he was not satisfied with the teaching of Lăo-Zǐ. One day, Sēng-Zhào read the Vimalakīrti-nirdeśa-sūtra and said “At last I know where I should be!” In Sēng-Zhào's treatises we can find the influences of Xuán-Xué(玄學) which is a metaphysics based on the teachings of Lăo-Zǐ, Zhuāng-Zǐ and Yì-Jīng(易經). There is a legend that tells the reason of Sēng-Zhào's death. Sēng-Zhào made Yáo-Xīng(姚興) angry and was executed. Before the time of death Sēng-Zhào wrote a poem as follows. “Originally, there is no owner in the ‘Four elements of the body’ and all the ‘Five Skandhas’ are empty. The white blade of a sword is now ready to cut my neck. But it seems like an event of cutting a spring wind.” We can reconstruct Seung-Rang's chronology through critical analysis of historical materials regarding him. It is as follows. 450C.E. circa: born in Yo-Dong(遼東) of Go-Gu-Ryeo(高句麗). 470C.E. circa: received the full precepts to be a monk in Yo-Dong. After 476C.E. circa: left for China. 476~479C.E. circa: perhaps visited Dùn-Huáng(燉煌), Chăng-Ān(長安) and Pīng-Chéng(平城) and learned Sān-Lùn philosophy. 479C.E.: came to Jiàn-Kāng(健康) area in the
目次
I. 승랑과 승조의 상반된 삶 11 II. 승조와 승랑의 생애 12 III. 승조와 승랑의 사상 21 IV. 승랑에게서 보이는 승조의 영향 28 V. 승조를 극복한 승랑의 유무론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