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선사는 그동안의 山中禪會를 정리하고 48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다른종교의 집회장소인 교회와 성당이었다. 여기서 불교의 열세함을 절감한 그는 도시포교의 원력을 세우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실천한 곳이 姜氏 신도집이었다. 포교 석 달이 채 못 되어 수백명의 신도를 교화하였다. 신도집에서는 한계가 있으므로 康永勻 집으로 이사하여 선종포교의 법규를 정하고 참선포교를 시작하였다. 아마도 이 집의 주소가 嘉會洞 211번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1911년부터 1922년까지 주석하면서 1912년에는 寺洞 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의 開敎師長으로 포교사가 되었으며, 한용운과 함께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수천명의 신도들을 교화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포교영역을 좀 더 깊이 있게 넓히고, 체계화하기 위해 대각사를 창건하게 된다. 처음에는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대각사의 창건년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1911년 4월 8일설과 1914년 창건설과 1916년 창건설이 있었다. 이 세 가지 설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고, 명확한 것이 1916년 창건설이다. 다른 것은 타인에 의해 정리 된 것이지만, 1916년 설은 본인의 구술로 직접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각사의 창건년대를 1916년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철창생활을 하다가 3년만에 출옥하여 보니 봉익동 1번지의 대각사를 이미 매각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가회동 211번지로 가 있으면서 1922년에 봉익동 2번지에 대각사를 재창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본격적인 포교와 전법, 역경, 독립운동, 불교개혁운동, 항일운동과 더불어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였다.
Zen master Yong-Sung finished his practice in the mountain, and went to Seoul. At first he visited church and cathedrals. He realized how Buddhism fell far behind, and made a firm vow of dissemination in the cities. Before three months, he developed hundreds of Buddhists at a layman's house. He started to build the Taegak-sa temple in order to broaden and systematize the areas of dissemination. Regarding the first of year of building the Taegak-sa temple, some says April 8, 1911, while others 1914, and 1916. Among them 1916 is the strongest because the master himself told about it. Therefore, we cannot help but accept the starting year as 1916. After he was released from the prison for the independent movement, the Taegak-sa temple was already abolished. He rebuilt the Taegak-sa temple at 2 Bongil-dong in 1922. Here he earnestly conducted dissemination, teaching of dharma, independent movement, Buddhist refreshment movement, struggle against Japanese colonialism, as well as Taegak-Kyo movement.
目次
I. 머리말 246 II. 시대적 배경 247 III. 상경 초기의 거주처 251 IV. 대각사 창건설 264 V. 대각사의 연혁 274 VI. 맺음말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