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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초기전래설의 재검토 -- 「단속사신행선사비문(斷俗寺神行禪師碑文)」의 분석=Reexamination on the Early Transmission of Sŏn in Silla-Focusing on the Analysis of the “Stone Inscription ofMeditation Master Shinhaeng at Dansok Temple”-
作者 최병헌 (著)=Choi, Byong-hon (au.)
出處題名 불교학연구=Korea Journal of Buddhist Studies
卷期v.41
出版日期2014.12
頁次111 - 141
出版者불교학연구회=佛教學研究會
出版者網址 http://www.kabs.re.kr/
出版地Daegu, South Korea [大邱, 韓國]
資料類型期刊論文=Journal Article
使用語言韓文=Korean
關鍵詞「신행선사비문」=Stone Inscription of Meditation Master Shinhaeng; 「지증대사비문」=Stone Inscription of Great Master Chijung; 법랑=Beomnang; 신행=Shinhaeng; 도신=Daoxin; 북종선=Northern line of Sŏn; 남종선=Southern line of Sŏn; 전법계보설=Genealogical records of the transmission of the Dharma
摘要법랑과 신행은 보리달마 계통 선종의 최초 전래자로서 한국선종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들이다. 법랑은 4조 도신(580~651)에게 선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신행(704~779)에 전하였고, 신행은 다시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을 전수해 온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학계 일각에서 법랑의 스승 도신과 신행 사이의 생존 연대상의 차이로 인하여 법랑의 전법 사실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법랑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인 「신행선사비문」에 의거하는 한 법랑이 신행의 스승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당에 유학하거나 도신의 선을 전수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가 이러한 진부한 문제를 새삼스럽게 다시 검토하게 된 동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 여부를 밝혀보려는 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불교사학계의 안이한 연구자세와 자료비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성을 촉구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거시적인 불교사의 흐름은 도외시한 채로 인물 개인이나 단편적인 사건에만 매달려 쉽게 결론을 내리는 안이한 연구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자료의 해석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고려하지 못하고 단편적 문구에만 매달려 편의적인 해석을 주저하지 않는 연구가 횡행하고 있음은 연구방법상의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법랑과 신행에 관한 이해는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연구방법상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라는 점에서 본고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한국선종사의 출발점이 되는 법랑과 신행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을 일으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자료상의 문제에 기인한다. 이 문제에 관한 자료로서는 「신행선사비문」(813년)과 「지증대사비문」(893년 무렵) 두 편의 비문이 전부인데, 각기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인 「신행선사비문」에 의거하는 한 신행은 법랑에게서 공부한 다음에 당에 가서 북종선을 전수해 왔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그런데 80년 뒤에 찬술된 「지증대사비문」에서는 법랑이 당에 유학하여 도신의 선법(동산법문)을 전수한 사실을 새로 추가하고, 또한 신행의 북종선 전법 사실을 빠뜨리는 대신에 「신행선사비문」에서 없었던, 신행과 당 숙종의 사이에서 시문을 교환한 사실을 추가하는 등 내용상의 차이점을 나타내 줌으로서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문제점으로 지적하려는 것은 두 비문 내용 사이의 차이점은 고려하지 않고, 안이하게 양자의 내용을 혼합하여 전법계보설을 구성하는 것으로 그치는 학계의 안이한 연구자세이다.
한편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에서는 최초의 선법 전래자로는 법랑이 아닌 신행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그 연대는 경덕왕 원년(742) 무렵으로 추정된다. 신행은 704년 출생하여 733년 30세 즈음에 출가하여 운정율사(運精律師)에게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그리고 735년 32세 때에 호거산의 법랑에게 찾아가서 3년 동안 수업하고, 법랑이 입적하자 738년 35세로 당에 유학가서 북종선의 신수의 손제자인 지공(志空) 문하에서 3년 동안 수업하여 인가받고, 742년 무렵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한 뒤 혜공왕 15년(779) 단속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37년 동안 북종선의 기본사상인 좌선간심(坐禪看心)과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의 방편법문(方便法門)을 홍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신행선사비문」에서 그의 귀국 이후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 소략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에 의한 북종선의 전래와 행화(行化)는 당시의 신라 불교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행이 입적한 뒤 34년이 지나서 그의 사법제자인 삼륜선사(三輪禪師)에 의해 현창사업으로서 영당과 부도, 그리고 비석이 수립되고 있었던 것을 보아 북종선은 그의 문도들에 의해서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석이 수립되는 헌덕왕 5년(813) 무렵 신라 불교계에서 북종선을 전승하고 있던 인물들은 신행의 문도 이외에도 더 있었던 것 같다. 최치원이 찬술한 「낭혜화상비문」에 의하면 신행선사비가 수립되기 1년 앞서 낭혜화상 무염이 13세로 출가하여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수업하고 있었는데, 그 법성은 일찍이 당에 유학하여 능가선, 즉 북종선을 전수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염은 법성의 당 유학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석사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게 찾아가 화엄학을 배우고, 뒤에 당에 가서도 화엄종의 본거지인 지상사를 찾아가 계속하여 화엄을 공부하였던 것을 보아 법성의 북종선은 화엄종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북종선이 원래 교학불교인 화엄종에서 남종선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과도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더욱이 800년 전후의 신라불교계는 화엄종이 주류적인 종파로서 크게 융성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무염이 뒤에 화엄종의 교학불교로서의 한계를 깨닫고 남종선으로 개종하였던 것과 궤를 같이하여 헌덕왕 13년(821) 도의가 남종선 계통의 홍주종을 전수받아 귀국하면서 교종에서 선종으로 불교계의 주류가 바뀌는 일대 파문이 일어나게 되었다.

Beomnang and Shinhaeng are regarded as the two earliest disseminators of the Sŏn (Ch. Chan meditation) tradition of Bodhidharma to Korea, and thus occupy the highest positions amongst Korean Sŏn patriarchs.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account, Beomnang studied in China under the fourth patriarch Daoxin (580~651), and upon his return to Silla, he transmitted the teachings to Shinhaeng (704~779). Shinhaeng visited China and is believed to have introduced the Northern Chan tradition to Silla. A few scholars have cast doubts on the veracity of Beomnang’s transmission because of the excessive time lag between Beomnang’s master Daoxin and Shinhaeng, but most have accepted the story at face value. However, an examination of the earliest extant record on Beomnang, the “Stone Inscription of Meditation Master Shinhaeng,” reveals that there is little doubt that Beomnang was the master of Shinhaeng; therefore, we cannot deny the fact that he traveled to Tang China, or that he transmitted Daoxin’s tradition.
I have decided to investigate this unresolved problem once more not only out of a mere desire to ascertain historical facts, but also to reveal the lack of rigor in the approach and drawbacks of the analytical framework of current scholarship o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It is my hope that this essay will motivate scholars to engage in self-introspection and reflect critically on the limitations of curr
目次Ⅰ. 머리말 113
Ⅱ. 「신행선사비문」과 신행의 생애 117
Ⅲ. 북종선의 전래 124
Ⅳ. 맺음말 131
ISSN15980642 (P)
點閱次數60
建檔日期2021.06.09
更新日期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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