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緣起法이 불타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Ⅰ)」의 속편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구미나 남방불교권에서 출간된 불교개론서에서는 불타 자내증을 대체로 3明이나 이와 관련된 4聖諦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일본이나 이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은 우리나라에서는 한결같이 緣起法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4성제의 ‘諦(satya)’는 ‘진리’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말일 뿐더러, 5部 4阿含에 언급된 불타 깨달음과 관련된 기사의 빈도나 文勢 상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연기법의경우 보다 훨씬 많고, 또한 강렬하다. 일반적으로 불타 자내증이 연기법이라고 할 때, 연기법은 相依性으로 이해되며, 그렇기 때문에 無常이고 無我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空은 연기의 이론적 귀결(연기-무자성-공)이라는 『중론』의 논리를 차용한 것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하다’거나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이다’고 하는 말은 초기불전 어디에도 없다. 무상과 무아는 다만 경험적 사실이지 추론을 통해 도출되는 이론적 귀결이 아니다. 諸經에 의하면, 불타의 성도는 3明(宿住智證明死生智證明漏盡智證明)을 깨달아 괴로움을 초래하는 일체의 원인(번뇌)을 斷盡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漏盡明은 4성제의 통찰을 통해 성취된다. 나아가 經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연기법에 대한 무지를 ‘無明’이라고 말하는 일이 없으며, 대개 과거미래현재의 三際나 4聖諦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8正道의 正見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성도직후의 順逆에 걸친 12연기의 內觀은 다만 集諦와 滅諦의 구체적인 내관으로 보아야 한다. 즉 초기경전에서 연기란 궁극적으로 과거미래현재생의 존재방식을 밝혀 이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12연기를 형용하는 ‘甚深難見(혹은 難知)’이라는 修辭 역시 대개의 경우 ‘전생에서 금생으로, 금생에서 후생으로 유전한다(從此世至彼世, 從彼世至此世)’는 말과 함께 설해진다. 그것은 理法으로서의 ‘연기’에 대한 말이 아니다. 또한 초기경전 상에서 無明(avidy)의 還滅인 明(vidy)의 용례는 오로지 3明이며, 3명은 과거미래현재의 三際에 대응한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불타 깨달음을 ‘연기법’이라고 하기보다는 ‘4성제’라고 하는 편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초기불교의 직접적인 해석체계라고 할 수 있는 아비달마불교의 전통적 이해였다. 불타 깨달음을 相依性의 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의 진리관(空觀)에 근거한 해석으로,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무시한 특정의 교파 혹은 특정지역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宗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Mainly in Korea and Japan, it is said to that Buddha obtained anuttarā samyaksaṃbodhi by awakening pratītya samutpāda, and they understand pratītya samutpāda as interdependence. But this is the interpretation through the view of truth of Mahāyāna(śūnyavāda). Because not only satya in arya satya is directly corresponded to the 'truth', but also the frequency and the intense of the articles related to Buddha awakening refered in Nikāya and Āgama are much more than pratītya samutpāda. In this study, it research about 4arya satya, 12pratītya samutpāda,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based on the facts that 4arya satya is Buddha awake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