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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효의 꿈, 범어사 총림건설=Seon Monk Jihyo Kim's Dream: Construction of the Beomeosa Chongrim
作者 김광식 (著)=Kim, Gwang-sik (au.)
出處題名 불교학보=佛教學報
卷期v.49 n.0
出版日期2008.08
頁次63 - 91
出版者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Institute for Buddhist Culture
出版者網址 https://abc.dongguk.edu/kbri/
出版地Korea [韓國]
資料類型期刊論文=Journal Article
使用語言韓文=Korean
附註項저자정보: 부천대학교 초빙교수
關鍵詞김지효; 하동산; 이청담; 총림건설=Chongrim construction; 불교정화운동; 범어사; 조계종=Jogye Order; 한국현대불교; Beomeosa Chongrim
摘要1960년대는 총림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총림 사찰이 등장하고, 총림이라는 표현이 불교의 다방면에서 회자되었다. 그러한 결과로서 나온 것이 1967년 해인총림을 시작으로 송광사, 통도사, 수덕사, 백양사의 조계종단 5개 총림이다. 그런데 범어사는 1910년대에 선찰대본산이라는 일정한 사격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근현대 불교사에서 그 위상이 뚜렷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림이 세워지지 않았다. 사실 범어사에서 총림건설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김지효 선사가 범어사에 총림을 건설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김지효의 총림에 대한 꿈의 개요를 살피고, 그 과정에서 나온 범어사 총림 건설의 개요 및 성격을 조망하였다. 선사인 김지효(1909~1989)는 범어사 출신으로 불교정화운동의 최일선에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하였던 하동산의 상좌로서, 선학원과 조계사 일대에서 전개된 정화불사에 열렬히 동참하였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1965년에 범어사 주지로 부임하여 총림건설에 앞장섰던 것이다. 김지효가 꿈꾸었던 총림은 선원 · 강원 · 율원 · 염불원을 갖춘 곳이 아니라 자급자족적인 참선도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장청규, 백용성의 선농불교, 이청담의 영산회상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행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농사를 지으면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는 총림을 꿈꾸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 총림 건설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던 것은 1950년대의 정화운동을 통해 대처승이라는 외적인 요인이 차단되면서, 비구승단 내부에서는 정화운동의 성과물을 챙기려는 행태가 노골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정화운동을 견인했던 고승, 중견승려들은 정화를 다시 해야 한다, 재정화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그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 총림 건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지효의 총림 건설의 시도는 1960년대 불교계의 시대적 고뇌에서 잉태된 것이라 하겠다. 김지효는 범어사 주지가 되면서 곧바로 총림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총림 건설에 대해 대중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추진하였다. 그는 이용범이라는 사업자와 손을 잡고 범어사 소유의 근처 땅을 처분하여 범어사 뒷산을 개간하는 경비로 충당하겠다는 구상을 점차 현실화 하였다. 그러나 범어사 대중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집단적으로 반대 하였다. 큰 저항에 직면한 김지효는 결국 범어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자연히 총림 건설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지효의 꿈과 실패는 그간 역사의 뒤안길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여기에서 범어사 대중, 그리고 조계종단의 후학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이라는 과거 역사에 나타난 사격과 위상을 재창조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decade of 1960s witnessed that several Chomrim temples (ecumenical centers usually including a seminary, a meditation hall, a Vinaya institute(yurwon), and a chanting hall) came out and the word, Chongrim, became well-known in various fields of Buddhism, so that it could be even called the age of Chongrim building. With the start of Haein Chongrim in 1967, four more ones - those of Songgwangsa, Tongdosa, Sudeoksa and Baekyangsa - appeared in the Jogye Order. Beomeosa, however, didn't become one despite the fact that it had already secured its position firmly as the head temple of Seon sect in 1910s in the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Buddhism. In fact, Seon Monk Jihyo Kim strove hard in many respects to construct one.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investigating Kim's dream of Chongrim building and viewing its outline and features. He lined up with a businessman, Yongbeom Lee, and gradually realized his conception to make up the expense of clearing the temple's mountain in its back by disposing of some land of its owning. Eventually faced with a strong opposition, Kim had no choice but to leave the temple with the Chongrim project coming to nothing. Ever since, Kim's dream and failure has been neglected in history but both the people in Beomeosa and the younger scholars of the Jogye Order should try to find something instructive in history. By doing so, Beomeosa can regain its lofty level and status as a head temple of Seon sect as shown in the past history.
目次I. 서언 65
II. 김지효의 총림 구상과 조령, 범어사에서의 실천 67
III. 김지효의 총림 건설에 나타난 성격 83
IV. 결어 88
ISSN12261386 (P)
點閱次數46
建檔日期2022.10.19
更新日期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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