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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계 삼보사찰의 성립과 지정=Founding & Designation of the Three Jewels Temples in Korean Buddhism; Buddha Sakyamuni: TongdoSa, Dhamma Dhaima:HaeinSa, Songha: SonggwangSa
作者 황인규 (著)=Hwang, In-gyu (au.)
出處題名 보조사상=普照思想=Journal of Bojo Jinul's Thought
卷期v.41 n.0
出版日期2014.02
頁次245 - 284
出版者普照思想研究院
出版地Korea [韓國]
資料類型期刊論文=Journal Article
使用語言韓文=Korean
附註項저자정보: 동국대학교(서울) 역사교육과 교수
關鍵詞통도사=Tong-Do-Sa; 혜인사=Dhamma Dhaima:Hae-In-Sa; 송광사=Songha: Song- Gueang-Sa; 나옹=Naong; 무학=Muhak; 고봉=Gobong; 16국사=the Sixteen National Monks; 삼보사찰=the Sangha Treasure Temple
摘要본고는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가 언제부터 삼보사찰로 부르게 되었는가 그 과정과 의의를 밝히고자 한 연구이다. 통도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에 의해 불사리가 모셔져 불보사찰, 해인사는 고려대장경판이 모셔져 불보사찰이라고 불린다. 송광사는 고려후기이래의 16국사가 배출되어 승보사찰이라고 하지만, 이 세 사찰을 묶어 삼보사찰로 부르기 시작한 시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통도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에 의해 불보사찰이 되었지만 해인사는 고려 대장경판이 이안된 시기인 조선초 이후일 것이다. 송광사는 고려후기 수선사 결사를 전개했던 보조국사 지눌과 그의 문도(손) 15국사가 하나로 묶여 추념된 이후에야 비로소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게 된다. 통도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에 의해 불사리를 봉안한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자장에 의해 봉안된 불사리는 황룡사 탑, 태화사 탑 등 사찰에 봉안되었으나 고려중기 혹은 조선초에 폐사되었다. 황룡사는 대표적인 국찰이었으나 용신신앙을 대표하는 위상 보다 상위인 불사리 신앙과 계율종의 중심인 통도사가 불보적 전통을 지녔다. 여말선초와 조선 중기인 임란시 통도사의 불사리가 개성과 한성을 비롯하여 태백산 정암사와 경북 달성 용연사, 금강산 건봉사 등에 분산 봉안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통도사는 조선후기 불사리 신앙의 중심을 이루면서 불가의 종찰로서 위상을 확보하여 조선말 삼보사찰로 지정되었다. 해인사는 신라시 창건되어 화엄종의 북악파의 본산이었으며, 고려시대 국찰로서 『고려실록』과 대장경이 봉안되었다. 당시 대장경판이 인경되기도 하였는데, 이 경판은 해인사 제경판으로 추정된다. 강화도에 봉안되었던 재조대장경판을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한성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이안되었다. 이는 왕사 무학의 주도로 화엄종 고승 설오와, 특히 해인사 주지 경남의 뜻이 반영된 듯하다. 해인사에 봉안된 재조대장경은 태조대 태조 이성계에 의해 인경되었으며, 조선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세조의 삼화상 혜각존자 신미와 묘각왕사 수미, 해인사 주지 죽헌과 학조 등에 의해 인경불사가 이루어져 전국의 대표적인 50 여 사찰에 봉안되었다. 이렇듯 해인사는 조선초 이후 법보사찰로서의 위상이 확보되었으며, 조선말 삼보사찰로 지정되었다. 송광사는 고려후기 수선사 결사를 전개했던 보조국사 지눌과 그 의문도(손) 15국사가 하나로 묶여 추념된 이후에야 비로소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게 된다. 송광사 제 16국사인 고봉법장이 입적한 세종 10년이후 조선중기에 국사로 추증이 된 듯하며, 그를 포한 16국사로 추념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임란후 송광사가 재건되면서 비롯된 듯하다. 그리고 이전의 시기에 확립된 불보사찰 통도사와 법보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한국 사찰을 대표하는 삼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었다. 송광사 16국사의 추념에 이어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이 16국사와 더불어 송광사 18주지로 추념되었다.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은 인도승 지공선현과 더불어 여말선초 삼화상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의 증명법사였다. 이렇듯 송광사는 조선시대 이후 사세의 부침이 있었지만 18주지의 추념을 통해 승보의 전통을 정립 계승하여 갔다. 현재 삼보사찰로 정립된 시기는 조선후기 문신 淵泉 洪奭周(1774~1842)의 문집에서 처음 보이고 있으며, 개화기 문인 김윤식도 그러한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續南遊錄』 등과 같은 저술류에서는 금산사가 불보사찰이라고 특기된 바 있다. 그러한 가운데 석왕사의 고승 龍嶽 慧堅과 그의 제자 九河 天輔, 특히 송광사 주지 錦溟 寶鼎, 통도사 강주였던 海曇 致益(1862~1942)과 만해 한용운 등이 삼보사찰의 지정을 특기하였다. 특히 한국불교를 집대성한 이능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삼보사찰을 그의 저술류에 특기하면서,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his paper aims to explore analyzing the Three Temples(or Temples of the Three Jewels), Buddha Sakyamuni:Tong-Do-Sa, Dhamma Dhaima:HaeinSa, Songha: SonggwangSa. Tongdosa in Yangsan is one of Jeokmyel-bogungs (the Sacred Buddha Relic Temples) and enshrines Jinsin-saris (sacred relics of the Buddha) which symbolize the Buddha-Dharma. In the mid 7th century, Ven. Jajang Sunim (A.D. 590~ 658), one of Korea’s greatest masters received relics of the Buddha from Munsubosal (Manjusri Bodhisattva) and brought them with him to Silla. He divided them into three portions and placed one each at Hwangryongsa, Taehwasa in Wulsan, and Tongdosa. He enshrined the relics in Geumgang-gyedan (Diamond Alter), the Main Dharma Hall . Thus, Tongdosa became the ‘Buddha Jewel’. Haeinsa in Hapcheon is also called ‘the Dharma Jewel’ because it houses the wooden printing blocks of the Tripitaka Koreana (complete Buddhist scriptures of the Koryo Dynasty). The Haeinsa-jangkyoungpan-jeon (Tripitaka Koreana Hall of Haeinsa) houses the collection and is one of the most precious one on siteThe Eighty-Thousand Tripitaka was first placed in Ganghwa Island's Seonwonsa, then moved to Jicheonsa outside of Seodaemun in Seoul in the 7th year of King Taejo's reign (1398)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again moved to Haeinsa Daejanggy eongpanjeon. The Songgwang temple developed after Jinul had established an integration movement of Buddhism in the middle Goryeo Dynasty. Then, Jinul’s disciples such as Hyesim enhanced the spirit of the movement as a chief leader, and the sixteen master monks including Jinul’s disciples led the Buddhist circle in the late Goryeo Dynasty. A chief monk of the Songgwang templ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Gobong Beopjang was not designated as a national monk, because the system of a king’s adviser and a national monk had been abolished. It is thought that the sixteen chief monks at the Songgwang temple have been cherished as national monks in the ‘Ship-youk-guk-sa-jin-young-gi (十六國師眞影記)’ written in 1621 during the middle Joseon Dynasty by Daega Heeok (代價希玉), Byeokam Gakseong’s fellow disciple. Naong an
目次1. 머리말 249

2. 고.중세 불보사찰과 법보사찰의 성립 250
1) 신라 통도사의 불사리 봉안과 불보사찰 250
2) 조선초 해인사의 대장경판 봉안과 법보사찰 257
3. 조선후기 승보사찰의 성립과 삼보사찰의 지정 262
1) 조선후기 승보사찰의 성립과 송광사 18주지 262
2) 조선말 불교계의 삼보사찰의 지정 270
4. 맺음말 275
ISSN12297968 (P)
DOIhttp://doi.org/10.22859/bojoss.2014..41.008
點閱次數27
建檔日期2023.01.29
更新日期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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